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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처의 문학 향기]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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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1 댓글 0건 조회 3,237회 작성일 21-04-16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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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계명대 타불라라사칼리지 교수〉 


푸시킨(1799~1837)의 '눈보라'는 '벨킨 이야기'에 들어 있는 단편소설이다. 

이 이야기는 눈보라로 인해 엇갈리는 두 남녀의 인생을 들려준다. 

부유한 지주의 딸 마리아는 프랑스 소설을 즐겨 읽는 열일곱 살의 낭만적인 처녀다. 

그녀는 가난한 소위보 블라디미르와 사랑에 빠지지만 부모는 결혼을 반대한다. 

둘은 몰래 결혼식을 올리기로 하고 이웃 마을의 교회로 향한다. 

눈보라를 만난 블라디미르는 약속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고 

마리아는 때마침 나타난 엉뚱한 남자와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눈보라'는 1812년 나폴레옹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자연의 불가항력 아래 뒤늦게 도착한 블라디미르는 마리아가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한 사실을 알고 

실의에 빠져 전쟁터로 나가 전사한다. 우연과 운명은 남녀의 인생을 혼동에 빠뜨리고 파괴하지만 

또 극적으로 묶어준다. 얼토당토않은 결혼식을 올린 마리아와 부르민, 두 남녀는 부조리 속에서 

혼란을 겪으며 운명에 휘둘리지만 고통의 시간을 이기고 삶을 전환할 힘을 마련한다. 

이들은 우연치 않은 국면을 맞아 재회하고 새로운 삶을 구축한다. 

인고의 시간이 개입되면서 두 사람의 인연은 숭고함으로 가치 상승한다.

'눈보라'는 1964년 소련에서 영화로 만들어졌다. 조국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미성숙한 남녀가 모순 상황 속에서 고난을 겪으며 성숙해 가는 과정을 그린다는 점에서 

인민을 개조하고 교육시키기에 적절한 소재였다. 이해하기 쉬우며 용기와 감명을 주는 스토리는 

"형식에 있어서는 민족적이고, 내용에 있어서는 사회주의적"이어야 한다는 소셜 리얼리즘의 

강령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대문호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더할 나위 없는 소재였다.

스비리도프(1914~1998)는 영화에 들어갈 9개의 곡을 작곡했다. 

그는 '눈보라'의 인상적인 장면들을 음악적으로 각색해 원작의 낭만적이고 사실적이며 

극적인 요소들을 눈에 보일듯 시각적으로 재현해 놓았다. 또 슬라브적 정서와 선율, 호소력 있는 

멜로디로 러시아의 풍토와 러시아 민족주의를 음악에 녹였다. 이 중에서도 '로만스'는 사랑의 비극을 

담은 애절한 선율로 널리 알려졌다. 작품을 읽다보면 청년들의 사랑에 안타까워하면서도 

19세기 러시아 귀족들의 교양과 품위, 자제력을 느낄 수 있다. 이 사회는 저속하고 노골적인 것들을 감추고 

세밀한 의식과 감식안, 겸양과 미덕, 명예와 같은 것들로 삶을 아름답게 장식할 줄 알았다.  

(영남일보 2021.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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