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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떻습니까) 신일희 계명대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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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3,885회 작성일 06-1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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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떻습니까) 신일희 계명대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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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一熙(신일희·67) 학교법인 계명대 이사장은 난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독문학 박사학위를 받고 연세대, 계명대 교수를 거쳐 38세 때 계명대 총장이 된 뒤 모두 다섯 번이나 총장직을 역임한 신 이사장이 자신을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

골프를 비롯해 운동을 모르고, 술과 담배를 일절 하지 않는데다 낚시나 바둑은 성격이 급해서 배우지 않았다고 했다. 가끔 박물관이나 화랑에 들러 전시회 등을 관람하는 게 취미생활의 전부일 정도다. 그러나 서울에서 대구까지 오는 승용차 안에서 말 한마디 없이 외국잡지 4권을 독파하고, 약간의 자투리 시간만 있어도 책에서 손을 놓지 않는다는 측근의 말에서 그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잡기를 외면한 만큼 학문적 깊이나 성과가 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난 2004년 7월 계명대 총장직을 끝으로 30여 년 몸담았던 교육계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선 그는 요즘 독서와 봉사활동으로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전했다.

신 이사장은 젊은 시절에는 카뮈의 에세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멜빌의 백경 같은 문학작품을 주로 읽었다.며 성장과정의 다양한 시련을 통해 숙성된 인간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간다는 측면에서 권하고 싶은 작품들이라고 했다.

요즘에는 국내외 역사나 문화사를 다룬 책을 주로 본다. 그가 젊은 시절 탐독했던 작품들은 자신의 삶과도 무관하지 않다. 1954년 15세때 100달러를 환전, 비행기 대신 배로 태평양을 건너고 기차로 대륙을 횡단해 유학길에 접어들었다. 미국에서는 접시닦이, 페인트공, 화장실 청소부, 골프장 캐디, 공사장 잡부로 온갖 험한 아르바이트를 하며 유학시절을 보냈다. 그는 골프장 캐디를 하면서 골프클럽 두 세트를 양 어깨에 짊어지고 땡볕에서 하루종일 걷던 때는 단 5분이라도 그늘에서 앉아 쉬는 게 최대 소원이었다. 농장일을 하면서 건초 조각이 피부에 박히던 고통스런 기억도 생생하다.고 했다.

계명대 대명동 캠퍼스 인근 사택, 대명동 캠퍼스 안 집무실 백학관, 성서캠퍼스 등이 최근 그의 주 활동공간이다.

비록 그 공간은 좁지만 지역사회를 위한 활동범위는 폭넓다. 신 이사장은 21세기 문화인은 유물의 창조나 자신을 위해 존재하기보다는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제3자나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총장 퇴임 후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2가지 사업은 계명장학재단과 (사)아카데미 후마나 활동이다. 장학재단 기금을 활용해 매년 1억 원 이상을 지역 중·고교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지원하고 있다. 내년에는 국내·외 학생들에게 2억 원 이상을 지원할 계획이다.

또 올해 제자들과 함께 토론, 특강, 해외견학 등을 위해 설립한 아카데미 후마나 사업은 활동영역을 점점 넓히고 있다. 지난봄 제자들과 함께 몽골을 방문해 현지문화와 실태를 살피고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한 데 이어 이달 초에는 지역 외국인 근로자들을 위한 자선 음악회를 열어 4천200만 원을 모금, 대한적십자사에 전달했다. 소외받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적십자병원에서 의료비용을 보전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신 이사장은 지역사회를 위한 왕성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가족을 돌보지 못한 점을 크게 안타까워했다. 부인과 슬하에 2남1녀를 두고 있는 그는 대학에만 신경 쓰다 보니 가정에는 소홀했다. 앞으로는 가족들이 1년에 한 번씩은 모두 모이는 자리를 마련해야겠다.고 했다. 그는 부인이 미국에서 아들을 출산할 때도, 큰딸이 수술을 받을 때도, 부인이 박사학위를 받을 때도 함께하지 못했다고 미안해했다. 그는 가장 최근에 아내와 함께 본 영화가 수년 전 진주만으로 기억된다.고 멋쩍게 웃었다. 학문과 교육에 온몸을 바쳤기에 가정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것.

신 이사장은 총장을 역임했던 지난 20여 년간의 교육계를 고등교육의 격동기이자, 전환기로 표현하며 지난 시절의 우여곡절과 소회를 되짚었다.

그는 학원 민주화를 소망하는 움직임과 고등교육의 탁월성을 추구하는 두 흐름이 상치되던 시절이었다.며 나는 주로 후자를 염두에 두고 급변하는 사회와 시대흐름에서 경쟁력을 갖추고 짧은 시간에 교육의 탁월성을 확보하기 위해 힘을 한쪽으로 쏟았다.고 말했다. 이어 교수들은 장시간 토론하고, 생각한 뒤 결론을 내려 했지만, 학교 운영방침은 달랐기 때문에 불협화음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지금 생각해보면 변화의 속도나 템포를 조금 더 늦췄더라면 불협화음이 없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회고했다.

다른 한편으로 외부의 입김이나 압력에 굴하지 않고 학문의 자율성을 지켜낸 부분을 소중한 성과로 강조했다. 그는 대학은 자율성이 보장돼야 하고 학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고 전제한 뒤 80년대부터 최근까지 정치·종교계를 비롯한 여러 기관이나 조직의 대학에 대한 간섭이나 압력으로 고초를 겪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대학의 자율성을 지켜냈다.고 자부했다.

그는 지역사회가 발전하기 위해 폐쇄성을 극복하면서 다른 사람의 얘기를 좋게 하고, 지역의 인물을 키울 수 있는 문화가 절실하다.고 했다. 또 지난 가치를 너무 경솔하게 폐기하거나 파괴하지 말고, 기성세대의 생각을 존중하는 풍토가 필요하다. 이는 우둔한 국민까지 존중할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젊은이들에 대한 조언도 덧붙였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 2006년 11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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