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 - 총동창회보(20-3월호)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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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산관(普山館)                                         목사는 계명대학교 법인 설립이사이자 경북노회장과 대한예수교장로
                                                                               회 총회장을 역임한  경력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다.
         1..30년 만에 설치한 약학대학                                                      뿐만 아니라 신후식 목사는 계명대학교 설립의 주체자 안두화 박사
                                                                               와 그의 부친 안의와(Rev. Dr. James E. Adems, 1867~1929) 박사
           계명대학교의 역사는 1899년 7월 한강 이남 약국의 효시라고 할 수
                                                                               와는 이미 선대로부터 깊은 인연이 있어 그 누구보다 가까운 관계에 있
         있는 미국약방을 개설하여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의 전신인 제중원(濟
                                                                               었고 또 계명대학교 설립과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동산 신태식 박
         衆院)과 함께 대구·경북에서 의료봉사를 하면서부터 시작한다.
                                                                               사와는 형제지간이었기에 계명대학교에 대한 애착은 남달리 매우 헌신
           이런 뿌리를 가진 계명대학교는 1978년 종합대학이 되고 1980년 동
                                                                               적이었다.
         산기독병원과 통합한 후 이같은 전통을 살리기 위해  그 후 30년 동안
         줄곧 약학대학 설치를 희망했었다. 그럼에도 정부의 약학대학 신설 및
         충원억제정책에 따라 매번 그 소망을 이루지 못하다가 2010년 마침내                                4..마음을 비운 등신 문화인 보산 신후식 목사
         약학대학 신설을 인가받고 2011학년도부터 신입생을 모집했다.                                      2006년 10월 13일 대구 실내 체육관에서 개최된 계성학교 개교 100
                                                                               주년 기념  ‘계성의 날’ 기념식에 초대받아  ‘장수 계성인 상’을 수상한 1
                                                                               백 1세의 신후식 목사가 감동적이고 힘찬 수상연설을 하자 참석한 모
                                                                               든 사람들이 기립 박수를 보냈고 그 자리에 참석했던 두레교회 김진홍
                                                                               목사가 신후식 목사에게 정신적, 육체적 장수의 비결을 묻자 김진홍 목
                                                                               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마음을 비우고 등신처럼 살았지.’
                                                                                 신후식 목사는 자칭 등신이고, 자신이 평생 등신처럼 살았으며 등신처럼
                                                                               살면 마음이 편하고 건강하며 100세 이상 장수한다고 가르쳐 주고 있다.
                                                                                 1978년 12월 신후식 목사는 자신의 생각을 접고 자식들의 뜻을 따라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아들 여섯 형제는 이미 미국에서 교수와 사업가
                                                                               등으로 자리 잡고 살고 있었고 딸(신명희)마저 미국으로 가면서 자식
                                                                               모두가 미국으로 가기를 간곡하게 요청하였던 것이다. 고희가 넘은 나
                                                                               이에 뼈를 묻을 고향과 평생 살던 집을 떠나는 것이 도저히 마음이 내
                                                                               키지 않았지만(등신처럼?) 자식들의 뜻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  학교법인 계명대학교 설립이사 보산 신후식 목사 기념관인 보산관(2013년 준공)                         미국에서 신후식 목사는 이민목사로서 주로 분쟁이 일고 불화가 있
                                                                               는 이민교회를 주로 맡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신후식 목사가 개입하
         2..학교법인 계명대학교 설립이사 보산(普山) 신후식(申厚植) 목사 기념관                             면 분쟁이 이외로 쉽게 타결이 되고 불화가 잦아 들었다. 또 워싱턴에
                                                                               한인청소년센터를 건립한다는 소식을  듣고  거금 일만 달러를 선뜻 내
           약학대학을 위해 (주)A.D.F, 미르건축이 설계하고 (주)유성건설이
                                                                               놓았다. 이렇게 신후식 목사는 30년 이민 목회자와 이민 교육자로서의
         2011년 7월에 기공, 2013년 2월에 준공한 약학대학관이 보산관(普山
                                                                               그의 목표를 마음을 비우면서(등신처럼?) 훌륭하게 달성했다.(김중순
         館)이다. 이 보산관은 총공사비 154억원, 연먼적 10,697.57㎡(3,236
                                                                               (2010), 『마음을 비우고 등신처럼 살았지』, 서울:소통).
         평)의 지상5층 철근콘크리트 붉은 벽돌건물이다.
           계명대학교는 2013년 4월 5일 약학대학관을 준공하면서 이 건물을
                                                                               5..신후식 목사의 아호 보산(普山)
         ‘보산관(普山館)’이라 명명했다. 보산관은 보산 신후식(1905~2010)
         목사의 계명대학교에 대한 공적을 기리는 기념관이다.                                            신후식 목사는 자신의 호를 보산(普山)이라고 일찌감치 지었다. 청
           보산 신후식 목사는 1905년 경북 청송에서 태어나 1929년 계성학                              송 보현산 아래에서 태어났으니 보산이요, 그곳에서 자라고 그곳에
         교와 1933년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36년 평양신학교 졸                                어머니가 있으니 보산이요, 결국 돌아와 안겨야 할 고향의 품이니 보
         업과 함께 경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36년부터 1943년                                 산이다.
         까지 계성학교 교목,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대구 대신교회 담임                                  2004년 계명대학교 설립이사로서 계명대학교 개교기념 행사에 초청
         목사,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대구공립중학교 교장, 1949년부터                               받아 한국에 온 신후식 목사는 고향인 청송 복동마을과 미국으로 가기
         1954년까지 대구 칠성교회 담임목사, 1952년부터 1962년까지 성명                              전에 담임목회를 했던 대구 청산교회를 방문했을 때 여러 사람들이 보
         여중학교, 신명여자고등학교 교장, 1966년부터 1978년까지 대구 청                                                                        현의 뜻을 물은 적이 있었
         산교회 담임목사, 1967년부터 1971년까지 계성중학교, 계성고등학                                                                         다. 그때 신후식 목사는 보
         교 교장을 역임했고 1942년, 1963년 두 차례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북                                                                       현을 불교의 복덕과 반야
         노회장, 1969년부터 1971년까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부회장, 회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
         장을 역임했다.                                                                                                       과 석가여래불을 지키면서
           특히 신후식 목사는 1953년 6월 11일 계성학교 교장실에서 개최된                                                                       불교의 진리와 수행의 덕
         계명대학교 설립을 위한 기성회준비위원회 창립위원의 한 사람으로                                                                             을 맡아 코끼리를 타고 다
         1954년 1월 8일까지 모두 8차례 이 기성회에 적극 참석하여 활동했고                                                                       니며 실천한 보현보살에서
         1955년 2월 5일 재단법인 계명기독대학 초대 설립이사로서 1961년까                                                                       유래되었고 보현산이 보현
         지, 1966년부터 1978년까지 20여년간 학교법인 계명대학교 이사로                                                                        보살이 타고 다닌 코끼리
         서 봉사하면서 어려운 시대에 계명대학교 설립과 발전에 그 누구보다                                                                           현상을 하고 있기 때문에
         큰 업적을 남겼다.                                                                                                     보현산이 되었다고 설명을
                                                                                                                        했다.

         3..계명대학교 설립과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                                                                                        (홍순희(2019),  ‘등신
                                                                                                                        으로  산  보산  신후식  목
           계명대학교 설립의 주역 역할을 한 안두화 박사(Rev. Dr. Edward
                                                                                                                        사’  『계명을 빛낸 사람들』
         N. Adams, 1895~1965)가 계명대학교 설립과 관련하여 주로 미국북
                                                                                                                        161~183쪽, 대구:계명대
         장로교회 뉴욕 해외선교부와의 재정지원과 관련되는 업무를 맡았다면
                                                                                                                        학교 출판부)
         동산 신태식(申泰植, 1909~2004) 박사는 한국 문교당국과의 관련 업
         무를 도맡았고, 보산 신후식 목사는 기독교 대학인 계명대학교를 위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와 그 산하 단체인 경북노회 등과의 관련 업무                                  ▲  보산 신후식 목사 추모비                                       (다음호에 계속)


         2020. 3. 31.(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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